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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굴로 인해 실시된 발굴이었지만 이 발굴에서는 뜻하지 않는 성과가 있었다. 조사 결과 비록 많은 도굴구가 확인되었고, 비목과 판자, 흙자루 등을 사용하여 갱도의 무너짐을 방지하면서 아주 철저하게 도굴한 수법 등으로 보아 대부분의 고분이 도굴되어 매장주체부는 대부분 파괴되고 비어 있을 것이라는 추측과는 달리 고분의 서북부에 위치한 1A호분으로 명명된 고분의 매장주체시설까지는 도굴갱이 도달하지 못하여 그 구조와 출토유물은 훼손됨이 없이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 도굴되지 않은 고분에서는 피장자의 신분을 알려주는 금제귀걸이, 완벽한 세트의 은제허리띠, 금동제 관모장식, 은장환두대도 등을 비롯하여 금동제의 굉갑 등과 이 피장자를 위해 순장된 사람의 금귀걸이 등이 주곽에서 출토되었다. 이러한 주곽의 출토유물은 이 고분의 피장자가 당시 압독 또는 압량으로 불리던 신라 지방소국의 최고지배자임을 증명한다. 이외에 부곽의 묘광 어깨면 위에서도 순장된 인골이 그의 부장유물과 함께 남아 있었고, 많은 마구류, 무기류 등의 금속유물도 출토되었다. 이렇게 부곽의 바깥에 순장한 예는 지금까지 임당유적에서 찾아볼 수 없는 예라서 주목을 받았다. 고분의 구조는 임당유적 고분의 특징인 주곽과 부곽을 ‘昌’자형인 종렬로 배치한 것이었고, 주곽에는 칸막이로 피장자의 공간과 유물부장 공간을 구분한 ‘日’자형의 목곽을 설치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등 그동안 미심쩍었던 목곽의 형태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Ⅰ. 머리말 27
Ⅱ. 조사경위 30
Ⅲ. 유적의 위치와 환경 37
Ⅳ. 임당 1호분의 조사내용 62
- 봉토
- 1A호의 매장시설과 유물
- 1B호의 매장시설과 유물
Ⅴ. 주변유구와 유물 400
Ⅵ. 맺음말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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